마르크스주의 관점으로 본 ‘헝거게임’

 

마르크스주의 관점으로 본  ‘헝거게임’ 

   영화 <헝거게임> 속의 사회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캐피톨이라는 지배계급(dominant)이 모여사는 사회’와 ‘사회필수 생산활동을 담당하는 12개의 구역이 모여사는 피지배계급(subordinate)의 사회’로 말이다. 캐피톨에 사는 사람들은 ‘오늘날 불로소득으로 가만히 앉아서 돈을 버는 자본가’처럼, 일하지 않아도 버튼만 누르면 음식이 나타나며, 매일 유흥과 오락을 즐기며 살아간다. 하지만 12개 구역에서는 ’12구역은 탄광마을, 다른 구역은 농업마을’ 등으로 나뉘어, 캐피톨을 위한 ‘임금노동자’의 운명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캐피톨과 가장 가까운 구역은 방위산업을 전담하며, 캐피톨과 가장 먼 곳은 가장 힘든 노동의 산업군을 담당한다.

[그들만을 위한, 그들만의 세상 ‘캐피톨’]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그러하듯, 캐피톨은 영리하다. 캐피톨은 자신들의 경제적, 사회적 지배계급을 유지시키기 위해 ‘헝거게임’이라는 사회시스템(idealogical state tools)을 만들었다. 피지배계급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싸우고 미워하도록 만들어, 지배계급인 자신들을 향해야 할 분노가 도리어 자신들과 똑같은 다른 피지배계급을 향하게 한 것이다. 나를 착취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 옆에 함께 착취당하는 사람을 향해 분노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마치 오늘날 바로 옆의 ‘친구들과 경쟁’하면서 자라야만 하는 아이들’의 모습과 자본주의 사회 속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이 아니라,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간의 마찰과 생존경쟁’으로 그 모습이 바뀐 것처럼 말이다. 

   헝거게임은 ‘1년에 한 번씩 각 구역별로 남녀 1명씩을 선발하여 총 24명을 특별경기장에 가둔 뒤, 한 사람만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 죽이는 결투’를 진행하며, 이를 모든 구역에 방송한다. 캐피톨은 과거 구역들이 반란을 일으킨 대가이자 앞으로의 지속적인 평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각 구역별로 사람들을 선발해 생존게임을 벌이게 함으로써 반란의 참혹함을 각 구역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고 두려움과 공포를 조장한다. 캐피톨을 향한 저항과 분노를 무디게 만들고, 앞으로일어날 수 있는 혁명의 씨앗을 사전에 밟아버리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를 ‘스포츠 축제’처럼 포장한다. 지배계급을 보호하는 그들만의 논리를 마치 ‘스포츠’로 순화하여 정치적 무의식(political unconscious)을 형성시킴으로써, 헝거게임 속에 담긴 그들의 폭력논리를 은폐하고, 마치 ‘평범한 스포츠정도로 사람들이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피지배계급끼리 서로 싸우도록 만듦으로써, 지배계급의 안전을 확보한다.  

[불공정한 추첨통, 가난할수록 더 불공정한]


   
헝거게임 참여자를 뽑는 추첨시스템 역시 약자에게 더 불공평한 구조다. 지배계급이 모여 사는 캐피톨 사람들은 이 헝거게임에 참여할 필요가 없지만, 모든 구역의 사람들은 생존을 건 죽음의 게임에 참가해야 할 위험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가난한 사람들이 처한 상황이다. 캐피톨에 의해 각 구역별로 정해진 일을 해야 하느라, 매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 불투명하다. 그러한 와중에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면, ‘헝거게임 참여자를 뽑는 추첨통’에 자신의 이름을 넣고 음식을 배급받을 수 있다.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는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죽음의 생존게임’에 참가하게 될 확률은 더 높아지는 것이다.

   불공평한 추첨시스템 뿐만이 아니라, 캐피톨은 헝거게임에서 살아남은 우승자들을 미화시키고 영웅화시킨다. ‘살아남은 최후의 1인만이 누리는 우승자투어’를 선전하고 우승자에게 평안한 인생을 보장하며, 남들을 짓밟고 죽여 살아남은 자를 우리가 선망해야 할 ‘영웅’처럼 표현한다. 다른 구역들이 한 해 동안 가난으로 신음하는 동안, 우승자가 배출 된 구역은 식량과 고급 식량 등을 많이 배급받게 된다. 그렇게 각 구역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고, 캐피톨의 권력에 종속된 채로 남들과 고통받는 이들은 잊고 살라는 이기적인 유혹과 충동을 받으며 살아가도록 만든다.

[구역 사람들에게 ‘헝거게임’을 생중계하는 캐피톨]

   캐피톨의 대통령 스노우는 ‘구역들의 반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게임설계자들과 캐피톨 장관들에게 사회적 압력을 끊임없이 행사한다. 캐피톨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기 위해, 자주 캐피톨 전용 방송을 모든 구역으로 내보내며,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보호하기 위해 피타’라는 인물을 세뇌시키고 길들여서, 캐피톨인 지배계급을 옹호하고 보호하는 발언을 쏟게 만든다. 캐피톨은 이를 다시 강제로 모든 구역에 방영한다. 이렇게 캐피톨이라는 지배계급을 보호하는 ‘이데올로기적 시스템’이 이 사회를 공고하게 유지시키고 보호하고 있다. 캐피톨은 자신들의 특별한 계급적 위치를 이러한 체제 속에서 유지시키며, 이를 지속적으로 보호한다.

[캐피톨에 맞서, 저항하는 캣니스]

  이에 캣니스라는 주인공은 의문을 제기한다. 피지배계급의 출신인 캣니스는 ’12구역의 광부마을’에서 태어나, 캐피톨로 대표되는 지배계급에 저항을 하며, 지배이데올로기 속에 감춰진 ‘거짓과 폭력의 논리’를 비판한다. 대체 이 싸움으로부터 이기는 사람은 누구죠? 구역끼리 서로 싸우고 죽이고 하는데, 언제나 이기는 건 캐피톨이에요. 나는 캐피톨을 위해서 그들의 노예들을 죽이는 짓은 그만할래요.”라며, 지배계급의 폭력논리를 고발한다.그렇게 캣니스는 구역들의 단합을 이끌어내, 끝내 캐피톨을 전복시킨다. 마치 마르크스가 유럽의 18-19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노동자들의 고통을 보고, 자본의 인간소외와 폭력성을 고발했듯이 말이다. 이처럼 영화 <헝거게임>에는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지배하기 위한 그들만의 논리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지배계급을 옹호하는 지배이데올로기의 ‘선전’과 그 ‘허구성’을 고발하고, 이에 피지배계급들이 단결하여 지배계급에 저항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캣니스의 호소에, 화답하는 구역사람들]


   사실 영화에 담긴 모습은 완벽하게 오늘의 사회 모습과 닮아있다
. 오늘의 자본주의 세상에는 ‘불로소득으로 먹고사는 자본가계급과 열심히 일해야만 겨우 먹고사는 임금노동자계급’으로 양분되어 있으며, 언제나 경제적 약자에게 더욱 불리한 사회이다. 그리고 그들은 언론을 통해 그들의 논리를 대변하고, 금권행사를 통해 그들의 이익을 대변해줄 정치인들에게 영향을 미쳐 압력을 행사한다. 그 속에서 생계에만 골몰하여 살아가는 우리 임금노동자들은 이 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와 선전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도, 각자도생·생존경쟁에 내몰려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더불어, 이를 세계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비교우위 무역이론이라는 엘리트중심의 논리 아래, 가난한 나라는 부가가치가 낮은 산업만을 담당하여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삶의 형편이 달라지지 않는 한편, 자본과 교육적인 면에서 강대국인 부자인 나라는 높은 생산성 아래 고부가가치 산업에 집중하며 보다 효율적인 이권을 누리는 삶을 살아간다.

   우리네 삶은 대체 무엇을 위한 삶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영화 <헝거게임>은 지금 우리의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우리 사회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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