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벽지』

 

나는 내 앞에서 고통받는 한 사람을 헤아리며 사는가.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의사. 의사인 남편은 아내의 아픔을 모른다. 문득 윤동주의 시 <병원>이 떠오른다. 늙은 일본인 의사가 일제강점 아래 살아가는 한 젊은이가 끌어안은 고뇌의 무게를 헤아릴 수 없었던 것처럼, 남편인 존은 아내의 병을 알지 못한다. 진료는 하나, 그 병이 어디에 근원하고 있는지를 모른다.의사는 치료해야 할 대상인 환자를 마주하고 있을 뿐, 그 너머의 한 사람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너무나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까. 의사와 환자의 관계 속에서, 둘 사이의 거리는 멀고도 멀어 보인다.

   의사인 오빠도 여동생의 아픔을 모른다.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가족 안에서도, 한 가족구성원의 아픔을 읽어내지 못한다. 이 소설은 이처럼 한 여성의 삶에 이리도 무감각한 사람들이 살아가던 시대의 풍경을 그려낸다. 시인 이성복이 시 <그 날>을 통해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고 그려냈던 것처럼, 병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남편과 오빠는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한 여성의 행동을 검열하고, 멋대로 판단하며, 독재한다. 존이 아내에게 자기중심적으로 내리는 처방은 마치 ‘생각은 내가 할 테니, 너희는 (목소리 없이) 그냥 따라와라’라고 외치는 지난 세기 독재자들의 외침처럼. 시대의 관념에 갇혀 여성은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는 식으로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소설 전반에 만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남편인 존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내에게 깊은 관심을 갖지만 그것이 아내에게 폭력으로 다가갈 수 있음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내를 위해서 행한다는 그의 행동이 아내를 자기검열하게 만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문제의식조차 느끼지 못하고, 자기세계에 갇혀 살아가는 듯하다. 아내가 남편 앞에서 자기통제를 하는 모습은 마치 판옵티콘 속 죄수의 모습을 닮았다. 기득권자의 폭력적 억압이 대중들에게 무의식적 자기검열을 강요하는 것처럼, 아내는 남편 존의 앞에서 완전한 자기검열을 한다. 아내가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도록 만든 연유는 남편 존의 개인적 문제였을까, 아니면 그 당대의 여느 남편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던 시대적·사회적 문제였을까.

  문제는 한동안 그녀 역시, 그러한 남편의 억압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한다. ‘남편의 자상함과 애정만을 부각하여, 남편을 미화하며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남편의 의해 자신이 원치 않는 강요된 집과 방에서 살아야했고, 그녀의 말 역시 번번이 묵살 당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작은 불만조차 표출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편이 나를 돌봐주고 배려해주고 있는데도, 자신을 신경과민으로 스스로 진단하면서까지 그녀는 남편을 보호한다. 억압과 강요, 폭력에 익숙해진 것이다. 그런 억압받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긍정하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자기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특히 피억압자에게는 더욱 그렇다. 예컨데 과거 노예가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 노예가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에 아무런 의문을 품지 못했다면, 즉 자신의 상태에 대해 아무런 질문도 생각도 하지 못했다면, 노예가 그 상태를 벗어날 수 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존이 아내에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이 그녀 자신의 상태에 생각하는 것이라며 건네었던 말은 내게 깊은 의문을 안겨주었다.

   남편 존은 정말 그녀를 순수하게 사랑했을까. 그녀를 정말 아끼고 위하는데, 과거의 여성적 성역할 관념에 갇혀서 그녀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의 사랑이 가벼운 것이었으며, 단지 남편으로서의 겉치레식 사랑의 표현에 머물렀던 것일까. 아니면 그 당대의 사회적 관념을 뛰어넘지는 못했지만, 그녀를 사랑했던 것만큼은 진실했던 것일까. 나는 노란 벽지를 읽는 내내 그의 사랑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은 시대가 가지고 있는 관념을 초월할 수 있을까, 초월할 수 없을까. 여성이 남성에게 억압을 받던 시대에, 이러한 관념자체를 초월했던 사랑은 과연 없었을까. 그의 사랑을 우리는 사랑이라 이름 지어 부를 수 있을까.

   그녀가 사용했던 방의 창문에 창살이 쳐져있었다는 점, 흉한 벽지로 도배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어떤 특정한 억압기제가 만연한 공간에 들어와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특히 소설 속의 노란벽지는 그녀가 여성으로서 화해할 수 없는 시대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그렇게 분열되어 버린 자기 자신에 대한 투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억압받고 있는 여성으로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모습이 때때로 혐오스럽게 보여 지기도 하고, 그것이 때때로 시각화, 후각화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반해 잠시 등장했던 남편 존의 누이는 그 당대의 여성의 역할에 아주 잘 길들여진 모습으로 보였는데, 노란벽지에 둘러싸여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성과 끊임없이 불화하고 번뇌하는 그녀와 대비되어 보였다. 그녀가 소설의 말미 방에서 창문 밖을 내다보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눈에는 창문 밖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모습이 사회적 억압에 짓눌려 기어 다니는 여자들의 모습으로 보였기 때문에. 창살에 갇힌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창살에 갇힌 것은 아닐까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에게 스산함과 혐오감을 주던 노란벽지가 있는 그 공간을 그녀가, 어느 순간 마음에 든다고 표현할 때, 나는 그녀가 그 상황에 길들여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노란벽지에서 불현 듯 보이는 그녀는 그녀 자기 자신인 것 같았고, 오히려 그 공간이 적어도 낮만큼은 남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자유로운 그 공간 안에서 남편을 긍정하고 합리화하며 견뎌온 자신의 내면의 억압된 자아들이 벽지를 매개체로 하여 보이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때문에 초록빛이 있는 현실에서는 억압된 채 살아야 하나, 노란빛 벽지로 둘러싸인 방에서는 그 순간만큼이라도 자유롭게 있을 수 있으니, 그곳에서 나가기 싫어했던 것은 아닐까.

   소설의 말미에 남편에게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오라는 말은. ‘내 내면 세계를 보여주려 하니, 내면세계로의 초대를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녀가 다 벗겨낸 벽지는 자신이 부정하고 싶은 억압된 자아였고, 그런 억압된 자아로부터 벗어난 한 여성의 낯선 모습이, 존을 기절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소설의 말미에야 자기 목소리를 남편에게 단호하게 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녀가, 그녀의 남편을 기어서 넘어가는 모습은 그녀와 작가의 의지를 보여주는 듯 했다.

   정신분열로 표현해야 했을 만큼 그 당시에 살던 한 여성이 가지던 고뇌는 얼마나 무거웠을까를 생각한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넘게 흐른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만연한 여성차별 혹은 억압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이름이 드러나지 않았던 주인공처럼,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알게 모르게 전통적 여성의 모습을 강요받고, 자신의 목소리와 행동을 억압당하며 살고 있는가.

   작년에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다음 생에는 여자로 태어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본래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으나, 여자로서 실제로 삶을 살아보지 않고서야 오늘날에 여성으로써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느낄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여성에게 차별과 억압이 가해지던 조선시대에 태어나, 설움과 고통을 견뎌야 했던 허난설헌을 비롯하여, 전통적 여성상의 이미지에 갇힌 신사임당, 더불어 오늘날에도 여류작가로 불리셨던 박경리 선생님을 떠올려본다면, 지난 세월 속에서 여성들이 받아온 부당함과 서러움에 대해 나는 헤아릴 길이 없다.

   여자로서 이 땅에 살아간다는 것. 남은 생을 마저 살아간다 할지라도, 내게 여성의 생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이란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그러한 문제 앞에서, 민감하고자 하는 나의 끝없는 노력이 있을 때,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과 내가 사랑하는 연인 그리고 어머니의 마음을 더 깊이 헤아리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사실 그녀의 모습이 오늘은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다. <노란벽지> 속 길먼이 그려낸 여 주인공처럼, 나는 오늘도 사회와 세상 속 질서 앞에서 불화한다. 그 갈등 속에서 나의 자아도 분열하는 것 같다. 공허와 허무를 말하던 이들의 삶이 궁금해진다. 그들의 삶은, 그의 고뇌는 어디에 가닿았을까. 헤밍웨이가 엽총으로 자살하기까지의 번뇌, 그가 전쟁과 이혼 그리고 방랑자의 삶을 살며 부르짖었던 허무는 무엇이었을까. 허난설헌이 말했던 세 가지 한, 그 한의 무게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에 비교할 바 못되는 나는 작은 번뇌에도 이리 신음하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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