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나는 왜 그가 좋은가.

   조르바. 나는 그가 좋다. 그가 좋은 건 분명한데, ‘그가 왜 좋은지를 한 마디로 깔끔하게 말할 수가 없다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고통이었다. 조르바의 한 모습만을 가지고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를 향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내가 말하는 그 하나의 모습 안에, 그의 존재 전체를 가둬버리게 될 까봐 두려웠다. 좋아하는 이성이 생기면, ‘그냥 좋지 이유가 있나’라며 은근슬쩍 넘어가듯, 나는 그에 대해 무어라 말하기를 주저했다. 단지 그와 함께 걸어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용기를 내어 물어보련다. ‘나는 왜 조르바가 좋은가’

   조르바, 그는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삶의 굴레와 질서. 그 속에 갇혀 온순한 양의 모습으로 살아가던 나에게, 죽비를 내리치는 존재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은 어떠하냐고 묻기를 주저 않는 그다. 그동안 시간이 아깝다는 핑계로, 잠깐 시간을 내어 하늘과 꽃을 바라보며 산책하기를 주저하던 내가 아니던가. 이런 나를 바라보며 조르바는 뭐라고 말할까. “두목 아직도 정신 못 차렸습니까. 저 놀라움으로 가득 찬 꽃을 보세요. 시간이 아깝다니. 두목의 시간을 돈과 같은 재화 따위로 환산해버리다니요. 이 자본주의의 노예 같으니라고.”라 말하지 않았을까.

   나는 조르바를 통해, 방황하는 ‘나라는 한 사람’을 바라본다. 조르바 덕분에, 내 모습을 더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 사회 안의 관념와 허영을 벗어나 자유로움을 간직한 그는, 그저 세상에 순응하며 살아왔던 나를 바라보게 한다. 꽃과 나무, 하늘과 바다를 기적처럼 바라보는 조르바 옆에, 익숙함에 길들여져 그 어떤 감동도 느끼지 못하는 내가 보인다. 그가 지난날의 모습에 대해 통렬한 반성과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낄 때, 나는 나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기 합리화를 하느라 바쁜 나를 본다. 조르바가 카잔차키스와 함께 열린 마음으로 가져온 진솔한 만남은, 나는 지금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과 진솔한 관계를 맺으며 함께 하고 있는지에 대해 묻게 한다.

   카잔차키스와 조르바의 만남. 책 속의 모든 이야기를 떠나, 나는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진솔했던 두 영혼의 뜨거운 만남을 생각한다. 카잔차키스와 헤어지기 전에 아무 말 없이 연거푸 술잔을 비워내던 조르바의 모습에서, 나는 진실로 마음을 주고받았던 한 사람을 바라본다. 그리고 지난날의 상처 속에 갇혀 아직도 다른 누군가에게 시원히 마음을 열지 못하는 나의 작은 모습도 바라본다. 나는 다른 어느 누군가에게 조르바처럼 뜨거웠던 적이 있었던가. 그럼에도 나의 무뚝뚝함을 품어주며 사랑으로 다가와 준 이들이 있었다. 내가 언젠가 울고 있을 때, 조용히 다가와 나를 안아주던 그 온기를 기억한다. 마음을 담은 편지를 내게 남겨주었던 이들을 생각한다. 나에게 조르바와 같은 벗으로 함께 해준 이들을 기억한다면, 앞으로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지, 아니 물을 수 없다. 조금 더 용기 내어 마음을 열어보자고 내게 다독인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때는 모든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곤 한다. 평소 먹던 똑같은 음식이라도, 아프고 난 뒤에 먹는 첫 끼로 먹게 되면 평소보다 더 황홀한 맛이 느껴지곤 한다. 분명 같은 풍경, 같은 장소, 같은 음식인데,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에 따라 나의 받아들임이 달라지는 것이다. 세계는 이리도 (개인에게) 주관적으로 인식되곤 한다. 내가 보기엔 최악일지라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최선일 수 있고, 내가 사랑으로 느끼는 것을 다른 누군가는 슬픔으로 느낄 수도 있다는 것. 세상은 너무나 상대적이라는 사실. 내가 ‘나라는 틀’안에 갇혀 다른 누군가의 삶을 가늠한다고 한들, 그건 오로지 내 세계 안에서만 그리 인식될 뿐, 나를 벗어난 타자의 세계에서는 전혀 다를 수 있음을 아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한 인간의 생각, 그 세계는 얼마나 협소한가.

   나는 살아가면서 ‘단 한 명의 사람이라도, 그 사람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한 사람의 생애를 헤아리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순간순간 짧은 만남들 속에서 그의 지난 나날과 아픔, 고통과 기쁨의 순간들을 읽어내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나는 다른 누군가에 대해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그렇기에 다른 누군가를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러한 마음을 간직한 조르바의 모습은 내게 큰 일깨움을 준다. 내가 언젠가 여러 책을 읽기 시작하고부터 못된 버릇이 하나 생겼었는데, 짧은 앎으로 누군가를 가르치려 들던 버릇이었다. 친구의 이야기를 잘 듣다가도 결국 끝에서는, 함부로 충고하기를 일삼았던 나에게 조르바는 이렇게 꾸짖는다. “두목, 하느님은 그 친구들도 굽어 살피고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나는 그와 함께하는 이들의 삶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조르바라는 한 사람을 바라본다. “두목, 먹어치운 양에게 미안하지도 않소? 우리 그 양이 노래나 춤이 되게 합시다.”라고 말하는 조르바의 한 마디 안에, 자신을 위해 죽어간 양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담겨있다고 말한다면, 나의 과한 상상일까?

   여성의 겉모습을 초월하여(그녀가 젊든 늙었든 예쁘든 못생겼든), 모든 여인의 모습 속에서 그 여인 뒤에 신비로운 위엄을 갖춘 아프로디테를 발견하는 조르바. 조르바가 한 여성을 대할 때면, 그로 인해 여성은 더 젊어지고 생기를 띠었다고 한다. 얼굴이라는 겉모습 뒤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조르바가, 다른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할 때 내면의 아름다움을 우선적으로 바라본다고 추측한다면 그것 역시 나의 과도한 상상일까?

   때때로 인간은 짐승이라고 말하기를 서슴지 않고 인간을 경멸하면서도, 동시에 그들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조르바를 바라보며, 나는 무슨 생각이 드는가. ‘두목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조르바의 한 마디 안에서, 그가 온 마음으로 사람들을 껴안고 살아오며 상처받았을 수많은 아픔들을 헤아린다면 그것 역시 나의 지나친 상상일까.

   나는 조르바 그를 무조건적으로 추켜세우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 역시 나처럼 삶을 살아가며 ‘방황하고 흔들리는 한 인간’일 뿐이다. 하지만 그가 살아내는 삶을 바라보며,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 삶이라는 아름다운 우주 속을 뜨겁게 느끼고 누비는 그를 보며, 나는 그 아름다움을 그저 흘려보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 하나의 생을 선물 받은 내가, 마치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랄까. 나는 조르바처럼 주위의 모든 시선을 잊고 자유롭게 춤을 춰본 적이 있었던가. 언제 몸을 통해 내 감정을 표현한 적이 있었던가. 나는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것에만 내 마음을 온전히 머물게 하며 살아본 적이 언제였던가. 조르바에게 산투르가 그러했듯이, 내가 정열적으로 사랑하는 무언가가 있는가. 그가 나에게 주는 부끄러움은 수치심이 아니다. 단지 그는 삶이라는 선물을 온전히 느끼고 이해하지 못했던 나의 모습을 직면하게 해주는 고마운 부끄러움이다. 때문에 나는 그 부끄러움이 참으로 고맙다.

   조르바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나에게, 나는 지금 ‘삶’을 살고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나 자신이 기계와 같은 경직된 존재가 아니라,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고 조화를 통해 자연과 일치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그는 내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존재인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나는 왜 조르바가 좋은가. 이제야 알았다. 그는 내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나는 지금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것이다. 그는 나 자신을 비록 부족하지만 꾸밈없는 솔직한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말을 통한 가르침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통한 뜨거운 감동으로 말이다. 조르바는 내게 그 어떤 요란한 말보다, 존재로서 사람다움과 삶을 밝히는 사람의 절정이다.

[인간다움]

   감사합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책을 읽고 독후감을 준비하는 동안, 오래도록 조르바와 함께 머물 수 있어 그것만으로도 참 좋았는데, 예상지 못한 상까지 받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지금도 여전히 감히 조르바를 읽었다고, 조르바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조르바와 함께 하며 떠오른 하나의 화두를 이 자리에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조르바와의 만남 중 개인적으로 제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조르바가 카잔차키스와 가졌던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뜨거운 만남”입니다. 나는 과연 그런 만남을 이어오고 있는가. 사람보다 돈이 중심이 되어버린, 자본주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인간소외.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상실. 저는 조르바와 카잔차키스가 가져왔던 그 뜨거운 만남에서, 지금의 제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아니 물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내 마음을 담은 손 편지 한 통, 아무런 이유없이 안부 전화를 건네어 본 지가 언제이던가. 자본에 길들여진 도시생활과 더불어, 혹시 나의 필요 이상의 과한 욕망이, 이 생에서 내가 누릴 수 있는 사람 대 사람으로서, 사람 대 자연으로써 누릴 수 있는 진솔한 만남을 도리어 막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1970년, 과거 전태일 열사께서는 평화시장의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고통 받는 어린 소녀들의 아픔을 세상에 부르짖으면서,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존엄을 외치셨지요. 그로부터 45여년이 흐른 오늘. 과연 무엇이 달라졌는가. 여전히 자본 앞에서, 사람의 인권과 존엄이 무시되고 핍박받는 오늘. 그와 동시에 다른 이웃의 고통 앞에서도, 익숙함에 무감각해져버린 저의 부끄러운 모습도 바라봅니다.조르바가 만약 오늘의 이 대한민국을 바라보았다면 무어라 말했을까요. 인간의 존엄이 정치적 이해와 실리 앞에 경시되는 오늘을 바라보며, 무어라 말했을까요. 마지막으로 조르바가 이 자리에서 섰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생각해봅니다.

   “두목,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우린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요.” 자본에 길들여져 잃어버린 우리의 삶과, 더불어 우리가 잃어버린 인간다움은 무엇인지, 인간다운 삶은 무엇인지. 그러한 인간다운 삶을 살려나가기 위해 내 삶 속에서 작은 무엇을 살려나가야 할지에 대해, 앞으로도 계속 고민해나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