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성공과 명예를 좇던 한 남자가 있었다.

   사회적 성공과 명예를 좇으며 살던 한 남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반 일리치. 이반 일리치가 죽었을 때, 동료들은 가장 먼저 자신이 죽지 않았음에 안도한다. 이반 일리치의 오랜 친구는 이반 일리치가 일했던 자리에, 아내의 처남이 일을 할 수도 있음에 골몰하고, 이반 일리치의 부인은 남편의 사망보다도, 남편의 사망으로 인해 국고에서 어떻게 연금을 지원받을 수 있는지만을 고민한다. 이반 일리치의 추도식이 있는 날 밤, 그의 동료들은 추도식이 아닌, 본래 하기로 계획되어 있던 카드놀이를 하러 모인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앞에서, 그의 죽음을 온전히 진심으로 애도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반 일리치는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그의 죽음앞에서 그의 측근들은 이리도 냉랭한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이반 일리치의 삶을 한 번 돌아보자. 이반 일리치는 허영이 많은 사람이었다. 자신의 아내를 맞아들이면서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한 것이 ‘고위층 사람들이 보기에 보기 좋은 결혼’을 하는 것이었다. 이반 일리치에게 결혼은 자신의 자만심을 채울 수 있는 길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는 항상 품위있게 사교계에서 인정받는 것을 삶의 중요한 일부로 여겼다. 이반 일리치는 아내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불쾌한 상황을 피하려고만 했는데, 그런 상황 자체가 사회적으로 보기에 그리 좋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가정과 아내와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보여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렇게 표면적으로 아내와 충돌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가족과 지내는 시간을 줄여나갔고,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늘려나갔다. 그는 가정에서 불화가 생길수록 일에 더욱 집중했다. 

   그는 사회적 체면을 중시하고, 외면적 성공을 과시하기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누군가를 감옥으로 잡아넣을 수 있다는 권력, 그리고 법정에 들어설 때나 부하직원을 만날 때 받는 존경적 시선,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과시할 수 있는 성공을 즐겼다. 그는 부자 혹은 명문가를 흉내내는 사람처럼 집을 특별하게 꾸미기도 했다. 그런 화려한 겉모습에서 오는 만족을 통해 기쁨을 누렸다. 가족들이 화려한 집을 보고 좋아하는 모습에, 그는 행복을 느꼈다. 그는 지체 높은 사람과 젊은 사람들이 그의 집들 드나드는데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했다. 공적 업무와 사교계 생활에서 오는 기쁨을 통해,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며 살았다. 그러한 사회적 허영에 빠져, 겉으로 보기에 초라한 사람들과 시시해 보이는 친구들은 물리쳤다. 때문에 그의 집은 오로지 최상층의 사람들만이 드나들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이반 일리치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는 의사를 만나러 갔지만, 그 의사는 이반 일리치의 병과 생명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저 이 병이 무슨 병인지 그것에만 몰두했다. 마치 자신이 자신의 권력에 취해 피고인들을 함부로 대했던 것처럼, 의사도 자신의 의술에 취해 눈 앞의 환자를 잊었던 것이다. 그가 의사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와, 의사와의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이야기하자, 딸과 아내는 그의 이야기를 마지못해 듣다 오래 참지 못하고 자리를 나섰다. 늘 자신이 남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로 여기며 살아왔지만, 자신에게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것에 대해 이반일리치는 끔찍해했다. 다른 이들로부터 사회적 성공을 이룬 자신의 모습 속에서 행복을 찾던 그가 아닌가! 타인의 부러운 시선을 자신의 행복으로 삼으며 살아왔던 그는 ‘배뇨와 배변’을 위해 자신에게 부착한 특수 용변기를 볼 때마다 괴로워했다. 용변을 볼 때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실을 너무나 괴로워했다.

    이반 일리치를 더욱 괴롭게 한 것은 주위 사람들의 ‘거짓’된 모습과 말들이었을 것이다. 의사와 지인들이 그에게 건네었던 형식적인 말과, 형식적인 애도만큼 그를 비참하게 한 것도 없으리라. 그가 그동안 형식적으로 맺어왔던 거짓된 만남, 거짓된 인간관계에서 토해져나오는 공허한 말들이 그를 더욱 괴롭게 했을 것이다. 아니, 그것은 무관심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병으로 인해 고통 받는 동안, 이반 일리치는 더욱 주위 사람들의 따스한 손길을 갈망했다. 소리내어 울고 싶었고, 그런 자신을 누군가 달래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오직 게라심만이 그를 진심으로 대했다. 게라심은 부엌일을 돕던 농부 출신으로, 이반 일리치 곁에서 유일하게 그를 진심으로 대하며, 간호를 했다. 그는 점점 자신을 진심으로 대해주는 게라심에게 마음을 열고, 그와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자신을 간호하느라 힘들 것이 분명한데도, 게라심이 아무렇지도 않게 선량한 얼굴로 자신을 대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반 일리치는 그제야 마음의 위로를 얻었다. 게라심과의 만남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실한 만남을 가지게 된다. 

   그는 홀로 자신의 영혼의 목소리와 마주한다. 영혼의 목소리가 묻는다. “이전의 삶이 기쁘고 즐거웠냐고” 헌데 그는 이전에 좋았던 순간들이, 그 이전처럼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죽음 앞에서 부질없어지는 사회적 성공에 대한 환상이 그제야 보였고, 자신의 허영이 보였다. 그 당시 기쁨으로 생각했던 것들은 모두 아무것도 아닌 역겨운 것으로 변해버렸다.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내가 잘못 살아온 건 아닐까? 세상 사람들은 내가 산을 오른다고 보았지만 내 발밑에서는 서서히 생명이 빠져나가고 있었던 거야……” p103 그는 죽음 앞에서 그제야 깨닫는다. “지금 현재로부터 멀어질수록 더욱 생명이 충만했던 시절이었다. 삶 속에 선량함도 훨씬 더 많았고 삶 그 자체도 훨씬 더 풍요로웠다. (…) ‘갈수록 고통이 더욱더 심해지듯이 내 삶의 모든 것은 더욱더 나빠져만 갔군.’” p107

   그는 그제야 깨닫는다. 자신이 살아온 삶이, 내가 기대했던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그런 삶이 아니었음을 말이다. 스스로 자신이 인생을 잘 살아오고 있다고 합리화하며 살아왔지만, 죽음 앞에서는 진실을 마주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삶을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냉엄한 진실과 후회를 마주해야만 했다. 죽음은 한 인간이 허영으로 가득 찬 삶의 공허함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끌었다. 죽음 앞에서 한 인간은 그제야, 자신의 삶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누워 새로운 시각에서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그는 그를 마주하고 있는 시종과 아내, 딸과 의사 그들의 말과 행동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바라보게 된다. 그는 깨닫는다. ‘그래, 내가 모두를 괴롭히고 있구나.’ 자기 안에만 갇혀 살아가던 그는 그제야 비로소, 가족이 보였다. 그는 가족들이 안쓰럽게 보였다. 가족들의 마음이 아프지 않기를 바랐다. 자신 안에 갇혀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지 못하던 그는, 그제야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 이런 글이 이어진다. “죽음 대신 빛이 있었다.”

   죽음을 마주해야만 하는 이가 끝에 마주했던 것은, 죽음이 아니라 빛이었다. 죽은 삶과도 다를 것이 없었던 공허한 삶의 자각. 그 자각의 끝에서, 한 인간은 삶에서 진정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삶을 진정 빛나게 하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랬기에 죽음을 마주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빛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 삶은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나의 고집과 아집에서 벗어나 나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대한 자아로부터 벗어나 내 눈 앞의 한 사람을 온전히 볼 수 있을 때, 내 안의 온갖 허영과 환상으로 벗어난 다음에야, 내 눈 앞의 한 사람도 이 세상도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반일리치, 그는 내게 물었다. 지금 나의 삶은 안녕하냐고.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내 삶에도 작은 의문을 제기한다. 내가 견고히 쌓아왔던 환상의 탑에 깊은 상처를 내어버린다. 사회적 부와 명예를 좇던 삶의 끝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앞만 보고 쫓아가는 좋은 대학과 직장, 화려한 스펙과 승진의 그 다음은 무엇인가를 묻게 한다.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다는 환상, 그 환상 속에 갇혀 있는 나를, 멈추어 응시하게 만든다. 죽음 앞에서 부질없는 삶의 모든 것들, 그 모든 것을 얻기 위해 언제나 나 자신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면서 살아왔건만, 이반 일리치가 만나야 했던 죽음, 그리고 앞으로 나 역시 만나야만 하는‘죽음’이라는 필연은 섬뜩하다 못해 공허하다. 지금의 나의 삶은 어떠한가. 그와 비슷하지는 않은가. 사실 흘러가는 삶 속에서, 내 삶을 멈추어 돌아보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더불어 내가 지금 삶을 온전히 살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마주한다는 것 역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리라.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잘 살고 있다며 무의식중에, 내 삶을 합리화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반 일리치가 병으로 침상에 누워있을 때, 영혼 없는 인간의 육신들이 문안을 건네 온다. 그 공허한 방문과 메아리 앞에서, 자신이 잘못 살아왔음을, 주위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며 살아왔음을 마주해야 했던 이반 일리치. 그의 고통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좀체 헤아릴 수 없다. 나름대로 잘 살기 위해 열심히 애쓰며 살아왔던 한 인간의 생애 앞에서, 나는 깊은 침묵을 가져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금 물어야만 했다.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인가.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인가. 무엇을 위해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 일의 끝은 무엇인가. 하지만 나의 새로운 변명과 합리화의 속삭임 앞에서, 나는 여전히 오늘의 나를 직시하기를 두려워한다.

   앞으로 더 잘 살기 위해서라도 지난날을 돌아보고, 그 속에서 나만의 교훈을 벗 삼아 살아가야 한다고 머릿속에서 끝없이 외쳐보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굼뜨다. 그런 지혜는 후회스런 삶을 다 살아내고 난 다음에 얻을 수 것이라고, 인간에게 그런 행운이란 쉽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메피스토펠레스가 내게 속삭이는 듯하다. 내 삶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오늘도 무의식적으로 TV를 켜고, 휴대폰을 켠다. 해야만 하는 누군가의 일에 나의 남은 기력을 팔아버린다. 어른들의 종용과 사회적 요구에 맞춰 따라 살아가는 순한 어린 양처럼, 나는 지금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내 삶의 주체성을 잃고, 해야만 하는 일에 매몰되어 학교에 가고, 회사에 가다가 내 삶의 방향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나도 이반 일리치처럼 삶의 끝자락에서, 지난 삶에 대한 후회로 생을 마무리하지는 않을까 모르겠다.

   죽음 앞에서 부와 명예라는 환상을 청산한 후, 이반 일리치는 지난 날을 돌아본다. 아내와 딸, 시종과 의사의 말과 행동으로부터,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응시하는 이반 일리치. 그동안 자신이 어떻게 가족들을 괴롭히고 있었고, 그로 인해 망가진 가족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그의 독백과 이러한 장면은 나를 무겁게 억누른다. 나 역시 지금 내가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내가 살아온 삶과 나의 언행을 마주해야만 했으니까.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삶이, 진정 내가 원한 것이었는지 물어야만 했으니까. 그의 뜨거운 고해 앞에서, 나도 나의 고해를 시작해야만 했으니까. 나 역시그동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었구나라는 자기고백을 받아들여야만 했으니까

   그럼에도 희망적인 사실은 이반 일리치와는 달리, 나는 아직 시한부 인생이 아니라는 사실. 내 언행에 깊은 책임을 느끼고, 내 삶을 되돌아보며, 지금부터라도 소중한 내 삶을 살려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죽음 끝에서, 비로소 “죽음 대신 빛이 있었다”고 고백할 수 있었지만, 나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라는 활자의 끝에서, 빛으로 나아가기 위한 희망을 품을 수 있으니까. 부디 나의 삶 속에서,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를 올바르게 분별할 수 있기를. 부질없고 작은 것들을 기쁘게 포기하고, 매 순간 나의 작은 죽음을 통해, 내 삶의 빛을 키워나가기를. 그렇게 나의 존재로 작은 생명들을 살려나갈 수 있기를. 나의 마지막 들숨과 날숨이 멈추기 직전, 나 역시 “죽음 대신 빛이 있었다”고 나지막하게 노래할 수 있기를.

   무엇을 삶이라 말할 수 있는가. 진정한 삶은 언제부터 시작되는가. 내 안에 자리하고 있는 환상의 청산과 자기합리화하기를 종용하는 그릇된 자아의 죽음 후에, 비로소 건강한 삶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환상과 허황됨을 쫓는 자아의 죽음 후에는, 내 두려움과는 달리 죽음 대신 빛이 있지는 않을까. 환상의 청산과 있는 그대로의 자기직시를 통해, 내 영혼의 작은 목소리를 살려나가는 삶. 그렇게 내 삶의 소중한 것들을 살려나가는 삶. 속 빈 화려한 껍데기의 가치를 종용하는 사회의 관념에서 벗어나, 진실 된 나 자신과 내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그렇게 매순간 내 과거의 삶에 작은 죽음을 고하고, 새로운 나의 삶과 마주하기를. 내 안에 자리한 부질없는 것들을 무너뜨리고, 나만의 삶, 나만의 다른 길로 걸어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