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속에서 저마다, 홀로 맞은 죽음의 무게들.

   소설가의 글과 화가의 그림은 같은 것일까. 김훈의 칼의 노래는 내게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닮은 것이었다. 독일 나치에 의해 학살당한 스페인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 사람들의 고통과 울부짖음을 그려냈던 피카소. 그런 피카소의 그림처럼, 김훈의 글에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의해 고통받은 ‘조선 민초의 고난’과 ‘일본에 맞서 나라를 근심하였던 이순신’의 고뇌와 신음이 담겨있다. ‘쓰이지 않는 장수’로 살기를 바라나, 쓰일 수밖에 없었던 한 장수. 그의 칼에 서린 한의 무게가, 김훈의 수없이 담금질된 언어 속에 담겨있다. 글도 그림과 같을 수 있는 것일까. 소설가는 일은 그림을 그리는 일일까. 가녀린 나의 상상에 김훈의 관찰과 추상을 더하니, 그의 글은 내게 그림이 되고, 눈물이 되었다.

   나의 몸은 전쟁을 모른다. 전쟁의 공포와 그 서늘함을 알지 못한다. 그런 내게 김훈은 실제 전장에서 장군과 민초, 병졸들이 감내해야 했을 상황과 운명을 담담하게 전해준다. 나는 전쟁과 임진왜란이라는 단어 속에서, 무엇을 얼마나 떠올릴 수 있는가. 그저 전쟁 속에서 민초들이 서로를 잡아먹고, 죽은 자의 시체를 뜯어먹었다는 사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 백성들이 적들이 토해낸 토악질을 먹기 위해 서로 싸워가며 핥아 빨아먹었다는 사실 속에서, 전쟁의 끔찍함과 처참함을 생각해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전쟁 속의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주해야 했을 두려움과 공포, 그 고통과 무서움까지 헤아려보기란 쉽지 않다. 전쟁 속에서 저마다 홀로죽음을 맞았을 한 사람 한 사람의 슬픈 운명에 대해, 그 죽음에 무게에 대해 헤아려보기란 쉽지 않다.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나의 가냘픔일 것이다. 생각해보라. 전쟁을 잘 아는 아비가, 전쟁에서 죽어간 아들의 고통을 헤아려보는 일에 대해. 그의 슬픔은 얼마나 큰 것이었을까. 나는 헤아릴 길이 없다. 나는 그저 이해할 수 없는 무력감 앞에서 신음할 뿐이다. 작은 칼의 스치는 베임에도 쓰라려하고 아파하는 나임에도, 나는 그 고통을 헤아릴 방법이 없다.

   때때로 역사적 사실은 문학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쟁으로 수십만 명의 사람이 죽음을 맞았다’는 역사적 사실은, 장문의 문학보다 간결하고 빠르다. 하지만 김훈의 글을 읽다보면, 오히려 문학이 역사적 사실을 압도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의 가냘픈 앎에서 떠올리는 상상력의 한계를, 문학은 해방시킨다. 작가의 치밀한 고증과 숙고 아래 남겨진 문학은 독자의 이해를 새로운 차원으로 초월시킨다. 임진왜란 속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마다 처한 상황 속에서 감내했을 속내를 떠올리고, 상상해보았을 작가의 무게를 생각해보라. 나는 임진왜란 속의 민중과 병졸, 이순신과 왕의 속내와 고뇌에 가까이 닿아있는 김훈의 시선과 예민함 앞에 깊은 존경을 감출 수 없다. 우리 모두가 김훈의 마음으로 우리네 역사를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한 사람을 헤아리기 위한 민감하고도 예민한 마음을 언제나 지니고 살 수 있다면, 우리는 타자의 고통 앞에 더 사려 깊을 수 있을까. 다른 누군가의 선택 앞에 섣부른 충고보다는 이해의 마음으로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함부로 판단하고 비판하고 심판하기보다, 자신조차 어찌 했을지 알 수 없을 한 사람의 선택의 고뇌 앞에서, 더 깊은 침묵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어느 한 권의 책일지라도, 책을 읽기 전의 사람과 읽고 난 후의 사람은 분명 다르다고 나는 믿는다. 칼의 노래를 읽기 전과 읽고 난 후에, 내 마음 속에 자리하는 임진왜란과 이순신도 분명히 다른 것이다. 문학은 긴 서사를 통해, 문학 속에서 전하고자 하는 주제에 새로운 의미와 시선,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 기존에 자리하고 있던 ‘단어’도, 문학을 만나고 나면 그것이 본래 지닌 의미와 자주 쓰이는 뜻 이상의, 새로운 다의적인 이미지로 확장된다. 나는 칼의 노래를 읽으며, 다른 사람들도 김훈의 임진왜란과 이순신을 만나보았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보았다. 나라를 지킨 장군으로서의 이순신이 아니라, 한 인간이자 어버이이자 장군이자 두려움 많은 임금의 신하였던 이순신을 만나보기를 기대한다. 일본이 쳐들어와서 고통 받았던 임진왜란의 기억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고통 받았던 우리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의 슬픈 삶의 내막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으면 한다. 역사적 사실보다 더 소중한 것은, 그 역사적 사실 뒤에 살아있는 과거 사람들의 실제 살아있었던 삶이고, 그 삶에 가닿고자 노력하는 후대인들의 상상일 것이다.

   나는 세상에서 유아독존이고 싶었던 어느 왕이, 승전한 장군을 흠모하는 백성들을 바라보며 느낀 그 두려움을 알지 못한다.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하는 왕의 마음을 다 알면서도, 코 앞에 닥쳐온 왜군을 두려워하여 어쩔 수 없이 자신을 풀어준 왕을 떠올리는 한 장군의 마음을 오늘날의 나는 헤아릴 수가 없다. 적의 존재가 살려준 한 나라의 장수의 몸에 자리하고 있는 생채기들을 생각한다. 적군과 더불어 자신을 두려워 한 왕이 남긴 상처와 날카로운 생채기를 이 시대에 사는 내가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무신으로서 전쟁에서 승리했을지라도, 홀로 조용히 자신의 죽음을 준비했을 한 장군의 마음을 오늘에 사는 내가 온전히 헤아리기란, 도무지 쉬운 일이 아니다.

   고독하고도 한 서린 칼을 휘둘러야만 했던 한 장수의 마음을 생각한다. 자신은 철저하게 무폭력이고 싶으나, 곁에서 죽어가는 이들의 아픔에 괴로워 꺼내든 칼날. 그의 칼날은 그런 칼날이었을까. 그런 칼날의 무게와 그 칼날에 서린 한은 얼마나 깊고도 날카로울까. 그와 동시에 연민으로 가득 찬 따뜻한 것이었을까. 그의 칼날은 또 다른 자기의 죽음이었을까. 인간을 베는 칼의 휘두름도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사랑으로도 그 날 선 칼을 휘두를 수 있을까. 이순신의 고뇌는 거기에 닿아 있을까. 그와 동시에 오늘도 보이지 않는 칼날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며 살아가는 나 자신을 바라본다. 나는 지금 어떤 칼날을 휘두르며 살아가는가. 나의 가벼운 칼날은 어디를 향하고 있으며, 어떤 무고한 사람의 희생을 치르게 하고 있는가.

   나는 빚을 진 사람이다. 어쩌면 이 땅에 사는 우리는 모두 의병과 동학, 국채보상운동과 3.1운동, 제주4.3항쟁과 4.19하야, 5.18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 IMF와 촛불혁명 속에서 빚진 사람들이다. 누군가의 피와 죽음으로 얻은 ‘이 땅 위의 자유와 평화’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이다. 우리는 모두 수많은 전태일과 또 다른 열사들과 오늘도 땅과 고공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이들의 눈물과 고통의 빚을 진 사람들이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희생과 고통 아래에서, 오늘의 안락을 누리는 사람들이다. 그게 아니면 몰라서, 가진 자들에 기생해서, 알고도 누군가의 고통에 침묵하며 살아가는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적어도 억울한 죽음, 피할 수 없는 죽음, 타자에 의해 고통 받았던 이들의 죽음으로 점철된 이 땅에서, 나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를 아니 물을 수 없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이 땅에 그릇된 희생을 막고, 근래 지속되고 있는 이 평화가 지속될 수 있도록, 나만의 한 걸음과 노력을 이어나갈 수 있어야 하겠다. 다시는 이런 전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하고자 붓을 들었던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처럼, 나는 무엇을 기억하고, 오늘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다시금 아니 물을 수 없다. 우리 안의 썩은 고름과 병폐를 직시하고, 한 시민으로 개인이 책임져야 할 이 사회의 슬픔과 고통은 무엇인지 헤아려보아야 할 것이다. 나만 바라보며 사는 동안, 오직 행복만을 추구하며 슬픔을 기피하는 동안, 내 곁에서 소리 없이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김훈의 민감하고도 깊은 헤아림의 시선으로. 망망대해를 앞에 두고 표류하는 나의 마음이, 홀로 몇 척의 배로 수백의 적선을 마주할 준비를 했던 이순신의 깊은 침묵과 정신을 닮았으면 한다. 실리보다 내가 믿는 대의를 온 몸으로 밀고나가는 그 삶의 모습과, 묵묵히 살아가는 용기를 닮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