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난한 눈에는 인류 절반의 고통이 보이지 않았다.

   인간, 지적인 비겁함에 갇힌 존재.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난 다음, 나홀로 나직인 말이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메모를 써내려 갔다.  자신의 폭력과 만행을 직시하기보다, 합리화하기에 바쁜 존재. 들여다보기 힘들거나 싫은 삶의 문제들을 애써 스스로 외면하고, 사회의 악이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면 이를 얼마든지 방관하며 살아가는 존재. 인간 자신의 편의와 욕망을 위해 자연과 동물들이 고통 받고 있음에도, 크게 개의치 않는 존재. 사실 그러한 폭력이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다면 크게 놀라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침묵하는 존재. 자신에 매몰되어 자신의 폭력성은 자각조차 못하고, 오히려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믿는 존재. 허영과 탐욕에 눈이 멀어 버려, 자신의 몸과 영혼이 마비된 존재들. 폭력의 익숙함에 젖어, 무감각하게 길들여진 존재로 살아가는 존재.

   인간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지금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적은 글이 아닐까 싶었다. 인간이라는 표현을 들먹이며, 내 안의 가난함을 가지고 인간을 이런 식으로 일반화하고 싶지는 않다. 게다가 인간이 이러한 모습으로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오직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모습은 인간의 삶에서 때때로 ‘이성이나 사고하는 힘’이 마비되거나 결여되었을 때, 인간은 그렇게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이성이 없다기보다, 이성의 마비 혹은 이성의 깊이가 얕다고 보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이성과 정신의 결여(혹은 마비)’는 인간의 삶을 수동적인 삶으로 이끈다. 보다 충동적이고, 감정적이며, 매몰적인 인간의 삶의 모습으로 말이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라고 누군가는 말한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이성’을 활용하며 살아갈까.

   이성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다수의 인간은 사회의 그릇된 사회적 폭력과 관념에 저항하는데 이성을 쓰기보다, 억압적 질서를 합리화하고 보호하는데 이성을 쓰며 살아간다. 이성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인류 절반이 겪고 있는 고통을 자각하지 못한다. 여성이 마주하고 있는 사회의 폭력들, 약자가 강자에 의해 핍박받고 있는 현실들을 자각하지 못한다. 자각하지 못하는 것일까, 자각하기가 싫은 것일까. 내가 이성을 가진 존재라면, 아마도 나의 이성은 참으로 가냘픈 것 일게다. 내가 이성을 가지지 못한 것이라면, 나는 물어야만 한다.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인가?

   어떤 사회적인 관습과 분위기, 그로부터의 익숙함에 젖어,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아무런 의문도 갖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세상의 수많은 편견들이 우리를 구속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압박하고 있는데, 그러한 사회적인 폭력들은 인지조차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의 이성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말도 안 되는 현실 앞에 왜 분개하지 못하고 있는가. 자본폭력과 국가폭력이 우리를 압살하고 있는데도, 그것이 폭력인 줄을 모른다. 제국주의로 식민지들을 거느리며 사람들을 착취하던 인간들, 피부의 색깔로 인간들을 구별 짓고 노예로 삼던 인간들을 비인간적인 사람들을 선진국 사람이라며 선망한다. 결투로 사람을 죽이던 ‘신사’나, ‘사무라이, 닌자’는 거부감이 들기보다, 흠모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왜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독재를 해온 소수의 왕과 귀족들이 여전히 특별하게 대우를 받고 있는가. 우리는 왜 현실 속에 만연한 왜곡과 폭력을 인지조차 못하는가. 우리의 정신과 감각은 왜 이렇게 무디어져 버렸나.

 

   군대는 인간에게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해왔다. 인간에게 저마다의 이성을 인간이기보다, 무조건적으로 명령에 복종하는 규율을 강요해왔다. 주체적인 인간이기보다, 수동적인 인간으로 만들어왔다. 그렇게 인간을 이성을 뭉개버린동물로 만들어왔다. 여전히 그러한 관습과 관념은 사회전체에 만연해있다. 이러한 군대식 복종과 규율은 학교로 전이된다. 성실하고도 말 잘 듣는 사람들을 길러내는 학교에서, 인간은 더욱 길들여진다. 군대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말 잘 듣고, 규율과 복종에 잘 따르는 인간’이 이상화된다. 이에 반항하는 이는 징계를 받고 벌을 받으며, 격리된다.

   군대의 중심주체는 남성이었다. 지난 사회의 중심주체 역시 남성이었다. 그러한 남성중심의 생각은 사회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남성으로서의 미덕이 강조된 ‘남성관’과 여성으로서의 미덕이 강조된 ‘여성관’이 강조되었다. 남자는 이러해야하고, 여자는 이러해야 한다는 식의 관념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인간이 만든 것은 아닌가. 그러한 말로부터 이권과 편안함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온 전유물은 아니던가. 그러한 생각들이 지금의 우리가 ‘남성과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프레임)을 만들지는 않았던가.

   여성 교육의 부재, 편협한 선견에 갇힌 사회 속에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의 당연한 권리를 강조한다. 왜 여성은 육체적인 아름다움으로써만 강조를 받고, 정신적인 고양에 따른 성숙한 모습으로써의 삶은 주목받지 못하는가. 왜 여성은 수동적으로 사랑을 받는 존재여야만 하는가. 왜 여성은 남성에 의해 종속적인 상태나, 폭력을 당하는 상태에서도 온화하고 순종적인 모습으로 살아가야만 하는가. 왜 인류의 절반은 그러한 관념에 의해 고통을 받으며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울스턴크래프트가 살았던 그 당대의 여성의 모습은 여성의 본성 근대로의 모습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그 당대에 ‘여성을 향해 가해지던 사회의 습관적인 길들임에 따른 ‘습관의 결과’로서의 모습‘도 존재한다. 여성으로 차별받고 수동적인 존재로 길들여진, 과거의 누적된 수만 시간의 축적 속에서 만들어진 여성의 모습도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한 모습이 여성의 생물학적 천성에 따른 절대적인 모습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다면, 여성에게 ‘이성’을 고양할 수 있는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다면 어땠을까. 주체적인 시민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다면 어땠을까. 남성과 동등한 대우를 받고 살아갔다면, 여성의 모습은 충분히 더욱 훌륭한 인격적 존재의 모습으로 사회에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이 울스턴크래프트의 견해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바른 교육을 통한, 인간의 ‘이성과 정신’의 계발의 중요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고 싶다. 만약 인간이 자신의 이성을 깊이 단련시켜,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관념의 억압성과 폭력성을 인지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달라질까. 스스로의 이성에 따라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신들 구속하는 관념으로부터 맞서 싸운다면 세상은 얼마나 달라질까.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220년 전, 18세기에 여성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올바르게 교육받을 권리를 요구해왔고, 우리는 그로부터 굉장히 진보한 세상 속에서 살며 그 변화를 목도하고 있다. 여전히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하지만, 그 변화의 움직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자본주의를 향한 비판과 그 병폐로 인한 변화의 요구는 여전히 과거와 비슷한 답보상태다. 몇몇 유럽 및 북유럽 국가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교육보다도, 여성의 겉모습의 아름다움만이 과대하게 찬양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여성해방을 위협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볼 일이다. 여성이 외면적인 치장, 화장, 성형, sexuality’에만 관심을 갖고 ‘이성, 정신, 사고하는 힘’을 키우는데 게을리 하게 되면, 울스턴크래프트가 말했던 것처럼 여성은 더욱 사랑받고자 하는수동적 삶을 지향하게 될지도 모른다. 외면적인 것에만 인간을 마음 쏟는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으로서의 이성과 지성의 높이를 낮추거나 마비시키고, 그로 인해 여성이 마주하고 있는 사회적 억압에 대한 인식을 하지 못하게 되거나, 여성으로써 다른 삶의 방식을 놓치게 하는 상황을 유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믿었다. 여성이 상속받은 부, 육체적 매력만을 강조하는것으로부터 벗어나, 여성의 이성과 정신을 고양하여, 다른 수많은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이성에의 추구가 여성을 ‘부유층을 따라하는 헛된 즐거움이나, 외면만을 꾸미는 행위, 매춘으로부터’ 해방시켜, 여성을 다른 삶의 수많은 길로 이끌 것이라고. 여성이 무지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때, 여성 삶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여성은 인형이 아니며, 남편에 의존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정치학을 공부하고 사회에 참여하며 사회 속에서 시민으로 의무를 다할 때, 여성의 삶은 수많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더 소중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여성은 육체와 정신의 힘을 모두 갖출 때에야 비로소 기품 있는 아름다움과 참된 우암함을 갖게 될 것이다. p164”

   생각해보라. 만일 여성이 태어나, 살아가면서 듣거나 보는 수많은 것들로부터 여성에 대한 특정 이미지를 꾸준히 주입받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 여성은 늘 보고, 듣던 여성관으로부터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보고 듣던 여성에 대한 이미지, 그 굴레로부터 쉽게 해방될 수 있을까. 어머니로부터, 아버지로부터, 친구로부터, 선생님으로부터 늘 들어왔던 여성에 대한 사회적인 관념을 초월할 수 있을까. 당연하게 여겨지는 그러한 ‘여성관’을 강요받는다면, 그로부터 어떻게 해방될 수 있겠는가. 생각해보자. 지금의 우리 역시 인류의 절반인 수많은 여성들에게, 오직 남성만을 위한 남성이 만들고 합리화한 이데올로기를 강요하고, 대물림하고, 세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남성, 여성의 구별 이전에, 성별 너머의 한 인간’, 먼저 한 사람의 인간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어머니, 아버지이기 이전에 한 인간을, 아내, 남편이기 이전에 한 인간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이성과 감정을 지닌 한 사람의 인간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남성이 만약 여성의 ‘육체적, 외적인’ 아름다움만 바라보지 않고, 그 여성안의 다른 인격적 아름다움, 정신적 성숙에 따른 아름다움이나 다른 내면적 가치를 바라볼 수 있다면, 세상은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

   울스턴크래프트의 외침을 기억하고 싶다. “이것은 우울한 진실이다. 그러나 축복받은 문명의 결과가 이것이다! p134” 오늘날에도 만연한 ‘여성차별, 여성폭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전히 인간해방은, 아직 멀고도 멀었다. 여전히 전통적인 ‘남성관과 여성관, 가부장제’에 갇혀 사는 남성들이, 자신들이 익숙하게 받아들여왔던 관념의 폭력성을 인지하고, 주위의 수많은 여성들의 고통을 헤아려보며, 그들과 똑같은 한 인간으로서 연대하여, 보다 더 큰 사회악에 맞서려고 할 때, 우리는 진정한 인간해방의 길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더불어 기억하자. 그동안 얼마나 수많은 여성들이 사회 속에서 꽃피울 수 있는 가능성들을 제한받아 왔는지. 지금도 신사임당과 같은 전통적인 어머니상이나, 수동적이고 외면적인 아름다움만을 강조하는 식의, 여성을 향한 그릇된 관념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마비된 사회가 오늘날 여성의 활동와 삶의 방식을 제한하고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