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과 성장만을 좇던 한국의 그림자,
망가진 다수의 소시민의 삶과 내면, 그리고 가정들.

   씁쓸함. 영화를 보고 난 이후, 작은 탄식과 함께 가슴에 떠오른 한 마디. 먼저 내가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할 그릇이 되지 못함을 이야기하고 이 글을 시작하고 싶다. 내가 만약 1996년에 30, 40대의 시선으로 이 영화를 봤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물음을 가져본다. 그랬다면 이 영화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을까. 일본의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는 제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사람들과 겪어보지 못한 이들 간의 거리를 ‘이십억 광년의 고독’이라 표현했다. 고작 20년 전의 이야기도 이리 내게 어렵거늘, 이십대인 나와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가 살아온 삶의 거리와 무게는 얼마쯤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차디찬 겨울의 풍파 속이 아닌, 봄에 태어난 내가 우리 어른세대들의 살아온 세월, 그 마음을 어찌 감히 헤아려볼 수 있을까.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한국의 1990년대 중산층의 모습과 위기’를 그려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먼저 나는 실제로 이 영화에 담긴 내용이 20년 전 소시민의 보편적인 일상 속 모습이라 할지라도, 이 작품을 1990년대의 중산층이 살아가는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작품으로 바라보고 싶지는 않다. 이 작품을 그 시대 풍경으로 보편화해 바라보기보다, 그 시대의 모습이 가진 하나의 단면으로 바라보려 한다. 무엇보다 내게 이 작품에서 주목되어 보였던 것은 소시민의 삶과 모습보다는 소시민 개개인 안의 내면적 풍경에 있었다. 등장인물들을 통해 비춰지는 그들의 행위 혹은 삶의 모습보다, 나는 그들의 언행 뒤에 자리하고 있는 “내면적 심리와 갈등”이 주목되어 보였다. 그들은 왜 스스로 작아지거나, 폭력적으로 살아가야만 했는가.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한국은 해방 이후, 지독한 배고픔과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6.25이후 우리 어르신들께서 끼니를 제대로 때우지 못했던 세월이 짧게는 10년 길게는 2,30년이 아니던가. 오죽하면 “밥은 먹었나, 밥은 먹고 나니냐”가 우리의 인사 표현이 되었을까. 그만큼 배고픔을 해소하고 싶은 갈망이 강했기에, 우리의 경제성장에 대한 열망이 역시 간절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래서였을까. 물론 어쩔 수 없음이 크게 작용했지만, 유신을 거쳐 전두환이 하야하는 1987년 6월 항쟁 전까지, 다수의 우리네 어르신들은 표현과 생각과 언론의 자유를 억압당해가면서, 그리고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온갖 질병을 얻으면서도 종일 장시간동안 오로지 일만 하는 기계처럼 살아오셨다. 그러한 수많은 노동자와 가족들의 희생 아래, 한국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성장을 이룩한다.

   하지만 경제성장에 집착하는 사이, 그동안 도외시되었던 다른 문제들 역시 하나둘씩 발견되기 시작한다. 성수대교 붕괴사건(1994, 동아건설), 삼풍백화점 붕괴사건(1995)과 같은 참사는 오로지 경제성장만을 고집하다가 우리의 도덕적 가치의 기준마저 잃어버린 경제성장의 그림자였다. 1970년 평화시장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고발하며, 지켜지지 않는 근로기준법 책을 끌어안고 자신의 몸을 불사 지르셨던 전태일 열사. 그 역시 한국의 경제성장이라는 미명아래, 자본가들의 욕망 뒤에서 억압받고 고통받았던 한국의 가슴 아픈 민낯을 보여주는 한 모습이 아니던가.

   오로지 경제성장만을 추구해오던 한국. 그러한 맥락과 시선 아래, 이 영화를 본다면 더욱 영화가 인상 깊게 와 닿지 않을까 한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이 영화는 한국 사회가 경제성장만을 고집하면서 그 이면에 가려 도외시 되었던, 한국 사회 내부의 문제들과 그 민낯을 고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린 사회는 무엇을 낳았는가. 돈과 사회적 지위처럼, 눈에 보이는 권력에 집착하는 개인을 만들어내고, 그 속에서 개인은 소외되었다. 사회적 성공을 중심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 돈 혹은 명예가 없는 사람들은 무시를 받음과 동시에 자기분노와 자괴감을 끌어안고 살아야했다. 이 영화는 그러한 물질 중심의 사회 속에서, 변방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낮은 자존감과 공허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개인의 도덕적 해이현상을 그려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도덕적 해이가 무엇인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이유로 보통의 경우라면 하지않을 일을, 자신의 실리에 피해가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냥 무시하거나 행하는 것이 아니던가. 영화 속에 비치는 삼류소설가 효섭의 양다리, 효섭과 보경의 불륜, 보경남편 동우의 외도 등은 자신의 개인적 결핍이 이끌어낸 도덕적 해이를 반영하고 있는 모습이라 생각된다. 여기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이들이 경제성장의 중심에서 번영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모두 변방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효섭은 삼류소설가요, 보경남편 동우 역시 출장 중에 상대회사 업체에게 미팅 약속을 강제로 변경당하거나, 동생에게 무시를 받는 모습으로 보았을 때 사회적으로 그리 잘나지 못한 일반 회사원이다. 그들의 결핍, 채워지지 못하는 갈망. 그것이 영화에서 불륜, 외도, 욕설과 폭력으로 난무하는 것은 아니던가. 어쩌면 경제성장의 혜택이 소수의 재벌에게만 돌아가고, 그 외의 나머지 재벌들의 번영에 부품이 되어버린 일반 시민들. 그 시민들의 망가진 삶을 홍상수는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영화의 원작인 구효섭의 『낯선 여름(1994)』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다만 영화에서는 3류 소설가 효섭을 통해, 사회적 성공으로 성공하지 못한 삼류 소설가가 한국 사회에서 경험하는 사회적 소외와 인간관계의 고립이 보인다. 효섭은 자신들보다 잘난 사람들에게는 자격지심을 보임과 동시에, 그 역시 자신보다 사회적 위치가 낮다고 생각되는 이들을 대놓고 무시하고, 내면적으로 자신과 그들을 구분짓는다. 이곳에서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만남은 없고, 오직 사회적 성공을 기준으로 구분되는 인간 사이의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한다. 이는 주인공의 대사로 잘 드러난다.

   “우리가 문학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왜 고기굽는 사람들이 끼어듭니까” “너가 아무리 기를 쓰고 발버둥쳐도 너는 더럽고 개 같은 똥이야. 나는 원래부터 이런 사랑만 하게 되어있는 사람이야” -효섭(삼류소설가)

   영화 속에서는 삼류 소설가 뿐만이 아니라, ‘자족’하지 못하는 모든 형태의 사람들, 사회로부터 주목받기보다 외면 받고 내몰리는 약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남편으로부터 자족하지 못해, 다른 남자를 만나는 보경. 소설가를 만난다는 환상을 가진 민재, 아내를 믿지 못하고 의심함과 동시에 다방여자랑 자는 보경의 남편, 특히 반사적으로 삼류 소설가의 말을 받아치는 종업원의 “어따 대고 반말이야, 어따 대고. 내가 그렇게 진짜 우습게 보여?”라는 말은, 그녀가 종업원의 위치에서 지금까지 사람들로부터 받아온 수많았던 무시를 짧지만 강하게 드러내는 말처럼 보인다.

   이 영화를 보며, 적은 나의 메모를 옮겨보자면 이렇다. 돈과 명예가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린 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 소외와 무시. 사회적 성공과 명예 그리고 직업을 기준으로 구분되는 보이지 않는 사람 사이의 계급의식. 그 계급의식에서 벌어지는 환상과 폭력. 사회적 강자가 약자에게 마음대로 행하는 만행, 돈 되는 것만 중시되는 사회질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 자신의 힘과 돈을 통해 자기 자신을 드러내며 자기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존재의 자위, 인간과의 만남은 없고 비교와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육체의 난무, 이성간의 진실한 사랑은 잊혀진 채 돈으로 사랑마저 사려는 공허함과 가난함. 사랑받지 못한 자와 결핍 된 자의 집착과 폭력, 우정마저 의심하고 금가게 만드는 불신 등.” 우리 사회가 경제성장이라는 열망 아래, 오직 돈과 눈에 보이는 명예와 권력이라는 허상을 좇다가 이 모양이 되었다고. 나는 홍상수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이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한국 중산층의 위기. 사실 20년이 지난 지금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현재진행형이다. 70년 전 김구·여운형 선생과 더불어 무고한 2·3만 제주도민의 죽음으로 울부짖은 우리 민족의 염원 남북통일은, 45년 전 전태일 열사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부르짖었던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엄은, 30년 전 이한열 열사의 죽음이 밀알이 되어 일구어낸 오늘의 민주주의는 다 어디로 갔는가.

   홍상수 감독은 20년 전 우리에게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통해 이렇게 경고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돈만 쫓던 한국이라는 돼지가, 잠시 도덕적 해이라는 우물에 빠져, 자기가 그동안 얼마나 에만 매몰되어 있었는지를 잠시 멈추어 돌아보라고. 그로 인해 우리가 놓쳐 온 것들에는 무엇이 있는지 한 번 살펴보라고. 대체 무엇을 위한 배부름이요, 무엇을 위한 성장이요, 무엇을 위한 돈의 추구였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쉽게 와 닿지 않아 한참을 생각했는데, 돼지는 자주 ‘돈’과 연결지어 상징된다는 의미에서 접근해보았다.)

   돼지가 우물에 빠졌을 때, 그제야 온갖 진흙으로 얼룩진 자기 자신을 잠시 들여다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멈추어서 뼈저리게 지난 나날을 돌아보아야 하겠다. 경제성장을 고집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놓쳐왔고, 지금의 우리가 무엇을 직면하게 되었는지. 그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개개인의 삶은 어떻게 망가졌고, 성장과 자본을 향한 우리의 맹목적인 추구가 우리 안에 어떤 공허와 허무와 결핍을 심어주었는지.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를 선언한 것도, 부르주아지 아래에서 겨우 헐벗은 삶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정도의 삶을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씁쓸한 운명’과, 지배계급의 실리를 위한 ‘부품이 되어버린 노동자의 굴레’를 타파하기 위함이 아니던가) 더불어 우리 민족의 염원인 통일과 민주화 그리고 ‘인간의 최소한의 존엄과 인간다운 삶의 최소한의 조건을 위하여 흘렸던 수많은 피와 눈물’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하겠다. 그래야만, 그래야만 앞으로의 대한민국도 보다 인간다운 사회로 나가기 위한 새로운 첫 발을 내딛을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