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망각

 

무엇이 기억되고, 무엇이 망각되고 있는가.

   과거의 기억은 살아있다. 이를 경험한 인간의 육신 곳곳에.  하지만 과거의 기억과 경험은 사라진다. 인간의 죽음과 함께. 새로이 자라나는 사람들은 모른다. 과거의 슬픔과 고통이 자리하는 순간의 역사들에 대해.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나의 몸과 마음은 알지 못한다.  한국전쟁의 기억도, 유신의 경험도, 군사정권의 체험도, 광주학살의 공포도 알지 못한다. 내게는 그와 관련된 직간접적인 어떤 상흔도 없다. 가냘픈 머리만이 몇 자의 글자와 이야기를 알 뿐이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과거의 억울함과 말로 다할 수 없을 슬픔은 세상 속에 자취를 감춘다. 진실은 사라지고, 죽음은 말을 하지 않는다. 

   대만의 제임스 홍 감독은 기억과 망각의 경험을 다룬다. 머리는 과거의 기억을 각자의 입장에 따라 망각하기도하지만, 몸은 과거의 기억을 망각하지 않는다. 과거 전쟁의 고통과 아픔을 여전히 끌어 안고서, 지금도 살아계신 분들이 있다. 그 분들의 몸에 새겨진 중일전쟁의 상흔들과 살아있는 상처들은 오늘도 과거의 고통에 대해 말한다. 전쟁의 잔인함과 폭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중일전쟁 때, 일본군 731부대는 세균전을 함께 벌였다. 세균을 만들어 퍼뜨려서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이다. 일본군 731부대는 전쟁중에 그곳에서 살아가던 민간인들과 전쟁포로를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벌였고, 그로인해 세균에 노출된 사람들의 다수는 사망했다. 이 다큐멘터리 속에는 그 세균에 노출되고도 살아남으신 분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세균에 노출되었던 당시는 2-7살 배기 어린아이들이었지만, 지금은 노년이 되어버리신 어르신들. 70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다큐멘터리라는 이름을 빌려, 살아남은 이들의 몸에만 새겨져있었던 상처의 울분들이 기록으로 남는다. 과잉정보시대에 자극정보들이 우리의 시선을 쉽게 채어가는 오늘이지만, 부디 이 울분과 기록들이 영상을 통해 작게라도 우리의 몸과 마음 한 켠에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시간은 무정하게 지나가버린다. 당시 성인이었던 일본 가해자들의 대부분은 이미 죽었고, 나이가 많아 인터뷰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중국의 피해자 분들 역시 인터뷰가 쉽지 않아보인다. 하지만 70년이라는 긴 세월 너머,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는 것들이 있다. 한 사람이 어린아이일 때부터 노년기가 될 때까지, 다리 한 켠에 자리하고 있는 세균들. 나의 눈에는 고름과 핏덩이로 짓눌린 가슴시린 상처만이 보일 뿐이다. 발에 사마귀 하나가 생겨도 매일매일 신경쓰이고, 작은 상처 하나에도 자주 마음이 불편하기도 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거늘. 매일 진물을 닦고 새 붕대를 감아도 하루면 누렇게 변해버리는 이 고통을 끌어안고, 다리를 절며 살아오셨을 그 분의 고통을 헤아리는 것은 오로지 나의 몫이다. 전쟁 전후로 제대로 된 의료혜택이나, 약의 처방도 없이 시골에서 오늘날까지 홀로 가족들과 끙끙앓으며 사셨을 그 분들의 마음은 어떠한 것이셨을까. 나는 헤아릴 길이 없다

   전쟁은 종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전쟁은 살아있는 끈질긴 것이다. 죽음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이들에게도 살아있는 죽음을 고한다. 사랑하는 이와 가족과 친구를 잃은 사람의 마음은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몸 속에 새겨진 고통의 흔적들과, 마음에 자리하는 트라우마들. 전쟁에서 살아돌아온 군인의 마음에도, 전쟁에서 살아남은 민간인들의 마음에도, 오로지 상처뿐이다. 그들은 살아도 살은 것이 아니요, 살아서도 보이지 않는 작은 죽음들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사람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고통 속에서,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그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때때로 내뱉는 몸부림과 울부짖음을 ‘분노나 괴성’으로 바라보는 것은 우리의 서글픈 눈이지만, 이를 슬픔과 연민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의 민감한 마음과 헤아림 뿐이다. 

   헤아릴 수 없는 ‘죽음과 살아있는 죽음들’을 남기는 전쟁은 무엇으로 시작되는가. 왜 전쟁은 일어나는가. 소수의 부당한 결정과 명령으로, 왜 무고한 이들이 죽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가. 그 전쟁으로 이득을 보는 자는 누구이고, 고통을 받는자는 누구인가. 인류의 삶 속에서 전쟁은 언제나 인간의 코 끝에 닿아있었다. 오늘이라고 다를 것인가. 전쟁을 알지 못하는 새로이 자라난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무엇이 진정 우리의 평화를 막고, 위협하는지에 대해 눈을 떠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투표로 뽑는 지도자는 전쟁을 결정할 권한이 있고, 우리 옆에서 살아가는 나라에서 뽑힌 지도자 역시 전쟁을 결정할 권한이 있다. 지도자를 올바로 뽑지 못하거나, 이를 제대로 감시하고 견제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평화는 지속될 수 없으리라. 

[2018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https://www.biff.kr/kor/html/program/prog_view.asp?idx=36960&c_idx=313&sp_idx=471&QueryStep=2 

 

부산국제영화제 영화설명 : 

중일전쟁 시기 하얼빈에 주둔했던 일본군 731부대는 비밀리에 생물학전 관련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은 전쟁포로들을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은 물론 길림성, 절강성, 강서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에서 민간인들의 몸에 치명적인 세균을 주입하기도 했다. <기억과 망각>에서 감독은 절강성 농촌 마을의 생존자들에 대한 실태조사에 동행하며 이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다. 대부분 10세 이전의 어린 나이에 세균주입을 당한 생존자들은 그 후유증으로 고통받으며 수십 년간 침묵 속에 살아왔다. 이제 그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남아있는 사람들의 기억도 희미해져 가고 있는 상황. 한편으로 영화는 생존해 있는 일부 731 부대원들의 인터뷰도 시도한다. 피해자들보다 훨씬 나이가 많음에도 정정하게 살아있는 그들은 비밀서약을 내세우며 증언을 회피하거나, 자신은 관여한 바 없다는 말로 책임을 외면하고 있다. 점차 악화하고 있는 피해자의 상처와 꾹 다문 가해자의 입, 그리고 차츰 잊혀가는 이들 모두의 기억 앞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안타까움은 커져만 간다. (허경)

-사진출처 : 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 (위의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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