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를 죽인 남자

 

나는 돈키호테를 죽일 용기가 있는가.

   영화가 끝난 후,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시간. 올라가는 자막 너머로, 어느 ‘한 사람’이 보였다. 그리스인 조르바와 돈키호테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조르바와 돈키호테의 삶과 정신을 사랑하고 알면서도, 정작 자신의 삶 앞에서는 참으로 굼뜬 사람이다. 그들의 삶을 예찬하고 그에 감동하면서도, 여전히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낸 다양한 박스 속에 갇혀 살아가고 있다. 냉엄한 현실 앞에서 경제적으로 실패할까봐 두려움에 갇혀있으며, 그 족쇄에 얽매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망설이고만 있다. 자신이 직접 기회를 만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고, 타자로부터 주어지는 적당한 기회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며 살고 있다. 선택하는 삶이 아닌 선택받는 삶에 순응하며 살고 있다. 바로 나였다.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남자>속에도, 그런 나 같은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주인공 토비. 그는 광고감독이다. 그는 10년 전, 젊은 날 스페인의 어느 마을로 찾아가서 ‘돈키호테’를 주제로 영화를 찍었다. 그는 돈키호테에 대해 모르는 구두닦이 할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가며, 돈키호테를 찍었다. 그는 영화감독으로써, 자신의 데뷔작을 왜 돈키호테를 주제로 찍었을까. 그가 돈키호테를 사랑해서 그를 영화로 찍으려했는지 아닌지에 대해,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는 영화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느낀 돈키호테를 알리고 보여주려고 했다. 나는 그가 자신이 사랑하는 돈키호테의 삶과 정신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었으리라고, 조심스레 추측할 뿐이다. 그랬기에 젊은 날 친구들과 굳이 스페인까지 와서,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가며 돈키호테를 찍지 않았겠는가.

   그는 그로부터 10년 후, 천재라는 명성을 얻은 ‘광고감독’이 된다. 그리고 돈키호테를 주제로 한 광고를 찍기 위해 다시 스페인으로 왔다. 10년 전 촬영을 했던 마을에는 과거 돈키호테 역할을 맡았던 구두닦이 할아버지가 여전히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구두닦이가 아닌, 돈키호테로 살고 있었다. 자신이 진짜 돈키호테라고 믿는 그런 사람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토비를 ‘산초’로 여기는 할아버지 곁에서, 토비는 ‘산초’의 눈을 통해 <돈키호테>를 직접 경험하고 바라보게 된다. 책으로만 알던 ‘돈키호테의 행동’을 할아버지를 통해 경험해보니, 토비는 그것이 실제로 얼마나 황당무계한 모습인지 몸소 느끼게 된다. 지난 10년 동안 세상의 질서에 익숙해져버린 토비의 눈에, 돈키호테 할아버지는 우스꽝스럽고도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는 미치광이일 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돈키호테를 자처하는 할아버지를 향한 사람들의 조소와 비웃음 속에서도, 개의치 않으며 돈키호테적 삶을 살아가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토비는 진짜 소설 속 <돈키호테>적 삶에 대해 깊이 느끼게 된다. 구두닦이 할아버지에게 돈키호테를 알려주었던 것은 자신이지만, 그런 진짜 돈키호테적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닌 그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영화감독이 아닌, 광고감독 된 토비. 10년 전의 토비는 어떤 자신의 모습을 꿈꿨을까. 그는 과거 자신이 찍고 싶은 ‘돈키호테’를 찍었던 영화감독이 아닌, 제작자의 돈에 운명을 맡기고, 그들이 원하는 작품을 연출해야 하는 광고감독이 되어있었다. 10년 전 정작 돈키호테를 알던 그는 돈키호테적 삶을 살지는 못했는데, 돈키호테에 대해서는 잘 모르던 ‘구두닦이 할아버지’는 토비 덕분에 그동안 ‘돈키호테’로 살아가고 있었다. 무모하면서도, 용감하며,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의 시선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자신만의 돈키호테적 삶이 아니라, 타자 돈키호테의 삶을 모방하며 살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할아버지는 돈키호테에 대해 알게 된 이후, 스스로 돈키호테의 삶을 선택하고, 직접 돈키호테로 삶을 살아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지혜와 앎에 대해 듣지만, 이를 실제로 살아내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안다. 삶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앎이란, 앎이 아닌 그저 남의 이야기에 불과한 ‘가벼운 것’임을 토비는 보여준다.

   영화의 말미에 토비는 ‘돈키호테’의 대사를 읊조린다. 극본 속 타자의 대사를 말하는 느낌이 아니라, 온전한 자신의 말처럼 돈키호테의 대사를 말한다. 머리로만 알던 돈키호테를 이제는 자신의 삶으로 체화할 수 있을 만큼의 경지에 오른 것일까.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돈키호테 할아버지와 함께 하면서, 그동안 잊고 살았던 자신의 시선과 목소리에 집중하게 된 것은 아닐까. 돈키호테라는 무서운 전염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돈키호테라는 정신을 다시금 이어받은 것은 아닐까. 소설 속 돈키호테와, 구두닦이 할아버지, 토비가 내뱉는 ‘똑같은 돈키호테 대사’들은 무의미한 동어반복이 아니다. 똑같은 대사 너머에는 그들이 체화해버린 돈키호테의 정신이 있다. 그들이 내뱉는 것은 똑같은 대사가 아니라, 그들 자신이 체화한 돈키호테의 정신이다. 돈키호테의 대사 너머로, 저마다 토해내고 있는 그들의 정신과 목소리를 느낀다면, 그것은 나의 지나친 해석일까.

   돈키호테가 되어버린 듯한 토비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그저 돈키호테의 말과 행동만을 되풀이하는 모방가로만 살아갈까. 아니, 토비는 돈키호테를 닮은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영화의 제목도 <돈키호테를 죽인 남자>가 아니던가. 토비는 분명 자신이 머리로만 알던, 돈키호테를 죽였다. 스스로 자신만의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기로 마음 먹은 또 다른 돈키호테, 토비가 되었다. 비로소 자신안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진실한 삶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감독은 우리에게도 말한다. 우리 안에 살고 있는 소설 속 주인공 ‘돈키호테’도 죽여야만 한다고. 돈키호테를 죽인 자리에, 자신이 직접 주인공으로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돈키호테적 정신을 머릿속에서 선망하지만 말고, 자신이 직접 돈키호테로 살아가야한다고. 세상의 질서와 타자의 시선에 구속되지 말고, 자신만의 삶을 걸어야 한다고. 남들의 눈에는 비정상적이고 미치광이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옳은 길일 것이라고. 남들 눈에 정상으로 보인다면, 어쩌면 그 말은 곧 타자의 정답으로 살아가는 것과 같을 테니까. 나만의 고유한 정답이 타자와 완전히 같을 리 없을 테니까. 타자에게 이해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단독적인 것일 테니까. 적어도 내 삶에서 만큼은, 타자의 이해범위로부터 초월해도 괜찮지 않을까. 타자가 생각하는 사회적 정답, 정상적인 삶으로부터 벗어나, 자기만의 고유한 삶을 살기 위해 말이다. 나에게는 용기가 있는가. 자신의 시선이 아닌 세상의 시선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돈키호테처럼, 그렇게 나만의 삶을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는 그런 용기가. 토비는 나에게 묻는다.

[2018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http://www.biff.kr/kor/html/program/prog_view.asp?idx=37016&c_idx=315&sp_idx=&QueryStep=2


[덧붙이며] 
– 영화를 보고 난 후, <오만과 편견 다시쓰기>가 떠올랐다. <오만과 편견>에게 현대판 <오만과 편견 다시쓰기>가 있다면, <돈키호테>에게는 현대판 <돈키호테를 죽인 남자>가 있다.
– 사진출처 : 부산국제영화제 (위의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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